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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것은 연애가 아니었다.
기간으로나 경험으로나 너와의 시간이 내겐 연애다웠던 첫 연애라고 생각했지만, 돌이켜보면 그것은 연애가 아니었다.
너와의 관계는 내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후로도 한참이나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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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는 늘 나의 잘못을 지적했다. 우리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건 늘 나였고 나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너는 늘 화가 났다. 너는 그 화를 제대로 컨트롤하지도 못했다.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며 의자를 집어던졌고, 나를 거칠게 끌고 가 핸드폰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. 자기 전 전화 통화를 하다가 화를 내며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던지거나, 혼자서 집 벽을 쳐서 다음날 다친 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. 나는 내가 정말로 잘못을 했든 하지 않았든, 네가 더 큰 사고를 칠 게 두려워 덮어놓고 사과해야 했다. 네가 나 때문에 다칠 게 무서웠다. 너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은 것임을,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, 그때 나는 주장하지 못했다. 그보다는 우리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, 네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이,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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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지 않았고 네가 만든 나의 허상을 좋아할 뿐이었지만, 그럼에도 나는 그 허상에 나를 끼워맞추려 애를 썼다. 쇄골이 보이는 티셔츠를 입었을 때 너는 나를 혼냈고 나는 그 옷을 더 이상 입을 수 없었다. 공개방송을 보러 갔다가 오래 좋아했던 가수를 보고 환호했는데 그때 네가 말도 안되는 질투를 했던 것에도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. 친구들하고 다같이 놀러 갔을 때 내가 신나게 짚라인을 타는 걸 보고 너는 또 나에게 화를 냈는데, 그때도 나는 사과했다. 우리는 동창이었지만 네 덕분에 나는 친구들과 모두 멀어졌다. 너는 내가 신나하는 걸, 노는 걸, 친구를 만나는 걸, 남자애들이랑 말 섞는 걸 싫어했고, 나는 친구 생일파티에도, 졸업파티에도 갈 수 없었다. 그렇지만 너는 이 모든 것에 참석하며 늘 '잘나가는' 그룹의 우두머리처럼 지냈지. 너는 밴드의 보컬이었지만, 너와 잠시 헤어졌던 기간 동안 밴드부에 들어갔던 나는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밴드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. 너는 남자들의 번호를 모두 지우게 하며 수시로 핸드폰을 검사했고, 대학에 들어간 후의 어느 날인가는 심지어 실수인 것처럼 나의 연락처를 깡그리 날려 버렸다. 내가 너 외에는 어떤 관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게끔 나를 가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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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는 성차별주의자였다. 네가 엄마와 누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나를 지키겠다고 했을 때, 나는 그게 감동적인 말인 줄로만 알았다. 내 몸은 나의 것이고 나는 누구에게 보호받아야 할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. 너는 결혼을 하면 내가 집에서 살림을 하길 바란다고 누누이 말했다. 언젠가 생선구이를 먹을 땐 가시를 잘 바르는 여자가 좋다며 엄마는 늘 가시를 발라 준다고 말했다.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와 외모를 품평했지만 내가 불편해하면 그래도 너는 말랐고 예쁘다고 말했다. 그러면서도 나보다 내 동생이 더 예쁘다고 하며 농담처럼 나를 돼지라고 놀렸다. 나는 내가 살이 찌면 네가 날 떠날까봐, 지나가는 여자들을 바라보듯이 나를 혐오하게 될까봐, 어느날 더 예쁜 여자를 만나면 나를 떠날까봐 늘 두려웠다. 네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. 너는 가뜩이나 낮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. 또 너는 전 여자친구와 나를 비교하는 말을 자주 했다. 전 여자친구는 엄마에게 꽃도 보내고 도시락도 챙겨줬는데 너는 왜 그렇게 여성스럽지 못하냐는 말을 했고, 나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여성스럽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. 여성스러웠던 너의 전 여자친구를 미워했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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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는 나에게 열등감이 있었다. 여자인 내가 너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 했고, 나나 내 학교를, 내가 속한 집단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말을 했다. 그렇게 하면 네가 더 잘난 사람처럼 느껴졌던 걸까. 결국 헤어지고 몇 년 후에 너는 우리 학교로 편입을 했다. 징글징글한 새끼라고 생각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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너의 취향에 따라, 나는 화장을 할 수도 없었고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도 없었다.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가기로 했던 날 내가 귀를 뚫고 나타났을 때 너는 왜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귀를 뚫었냐고 화를 냈다. 나는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음에도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사과를 해야 했다. 그렇지 않으면 불같은 네 성질에 어떤 사단이 날 지 몰랐으니까. 관계를 가질 때에도 내 몸과 기분을 배려하지 않았고, 내가 거부 의사를 표하든 말든 네 멋대로 행동하고 거칠게 내 몸을 다뤘다. 사람들이 많아도 멋대로 내 몸을 만졌고 하지 말라고 하면 장난처럼, 그치만 때론 정말 아프게 나를 물었다. 내 팔이나 어깨엔 너의 이빨 자국대로 난 멍들이 항상 있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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헤어지자고 하면 늘 아이처럼 울면서 돌아오는 너를 나는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. 나밖에 없다고 나 없인 못 산다고 취해서 난동을 부리거나 기숙사에 찾아와 품에 안겨 우는 너를, 나는 냉정하게 내치지 못하고 매번 힘겹게 받아들였다. 이제는 잘해주지 않을까,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조금이라도 하게 해 주지 않을까, 아주 작은 희망을 품었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고 너는 오히려 헤어지자고 한 나를 탓했다. 늘 나의 잘못이었고 내가 너무 이기적인 탓이었다. 관계를 위해 '욕심'을 양보할 줄 모르는,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고 한참 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네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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결국 나는 너를 떠나는 데 성공했다. 나는 늘 많은 걸 경험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, 네가 나를 막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. 그렇지만 널 떠나고 나서도 트라우마는 계속 남아 나는 한동안 우울했고 상담을 받아야 했다.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도 없었다. 가장 반짝거렸어야 할 시기에 나는 그렇게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잠근 채 혼자 지냈다. 그건 사랑이 아니라 데이트 폭력이었다는 걸, 내 탓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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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모든 이야기를 나는 너에게 끝내 하지 못했다. 헤어질 때 내가 왜 너를 떠나는지 꼼꼼하게 따지고 너를 면전에서 욕하지 못했다.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피해와 아픔을 줬는지,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과 네가 잘못한 게 뭐였는지 알려주지 못했다. 아직도 나는 종종 너의 꿈을 꾼다. 폭력적이던 그때 모습 그대로일 때도, 세상 다정한 연인일 때도 있지만, 주로 네가 나오는 꿈 속에서 나는 너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한다. 소리를 지르고 악다구니를 쓰며 너에게 욕을 한다.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던, 아니 적어도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줬던 그때의 어리석은 나에게 화가 나서, 아직도 나는 너를 만나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꿈을 꾼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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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적인 관계를 만든 지금 굳이 과거를 돌이켜 이 글을 쓰는 이유도, 내가 아직 너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. 그 감정이 아직도 남아 나를 갉아 먹기 때문이다. 그때의 나를 불쌍히 여기다 자기연민에 빠져 버리는 것도 지쳤기 때문이다. 지금도 화가 나기 때문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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동창이다보니 헤어진 후에도 우리는 몇 번 만났고 앞으로도 종종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있을 것이다. 솔직히 나는 너를 저주했고 네가 망하길 빌었다. 간절하게. 행복할 수 없기를, 영원히 괴롭기를 바랐다. 그렇지만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것도 아니고, 미성숙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. 나는 굳이 너와 말을 섞고 싶지는 않다. 다만 네가 성장했기를, 내게 잘못했던 것을 알게 되기를, 그래서 앞으로 어떤 다른 여자에게도 비슷한 고통을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. 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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